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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53
한자 金蹄驛
영어공식명칭 Gimjeyeo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행 시기/일시 1485년연표보기 - 김제역 시행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김제역 폐지
관할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3리 ‘역말’ 지도보기

[정의]

조선시대 세종 지역에 있던 역.

[개설]

김제역(金蹄驛)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3리 ‘역말’에 있었던 역원이다.

김제역이 있었던 대곡3리 역말은 행정구역상 세종특별자치시에 속하지만 천안시와의 접경에 가깝다. 천안 시내에서 불과 10㎞ 정도 거리에 불과하며 국도 제1호가 통과하고 있어 주민들의 생활권이 천안 시내 권역인 지역이다.

김제역은 충청도에 설치된 성환도(成歡道)의 11개 역 중 하나로, 천안에서 공주·연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驛)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문 전달과 사신 및 관리의 여행에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으로,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원(驛院)으로 통칭되었다. 이러한 역원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여 왔으며, 1895년(고종 32) 근대적인 전화·전보통신 시설이 설치되기 전까지 군사통신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30리(里)마다 1개 역을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역장 2~3명, 역정호 7~75명을 배치하였다. 고려 초기 6과 체제에서는 제도순관(諸道巡官)을 두었고, 그 뒤에 시행된 22역도 체제에서는 공역서(供驛署)의 관할 아래 관역사(館驛使)를 두었다. 그리고 고려 말에는 역승(驛丞)의 지휘·감독 아래 역을 운영했다.

그러나 몽골 침입 등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폐단이 나타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대적인 재정비를 이루게 된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4군 6진 등 북방역로의 신설과 역의 합병, 역의 원근(遠近)에 따른 역도 재편, 합배(合排)[조선 전기에 함길도나 평안도의 군사 요지에 특별히 마련한 우역촌(郵驛村). 역은 아니었으나 역의 일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였음] 설치 등을 통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성종대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역참 조직, 즉 41역도 500여 개의 역로망이 구성되었다. 김제역 또한 이러한 조선시대 역원 중 하나로 조선 초기부터 성환도(成歡道) 11개 역 중 하나였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부터 1895년에 편찬된 『호서읍지』와 1900년경의 각종 공문서에 관련 기록이 나타난다. 가장 최근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1530]에는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在郡南二十三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9~1765]에는 소정면 관아 남쪽 20리에 있으며, 말 15필, 노 45명, 비 12명이 있고, 성환 소속[在小東面自官南距二十里 馬 十五匹 奴 四十五口 婢 十二口 成歡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18~19세기]의 “在小東面今在全義地自邑二十里 馬 十五匹 奴 四十 五口 婢 十二口”, 『대동지지』(大東地志)[1865]의 “南二十里”, 『대동여지지』(大東與地志)[1861]의 “在郡南二十二里”, 『호서읍지』(湖西邑志)[1871]의 “在小東二十二里 馬 十五匹 奴 四十五口 婢 十二口”, 『호서읍지』(湖西邑志)[1895]의 “在小東面二十二里 馬 十五匹 奴 四十五口 婢 十二 口 今無 屬成歡”과 같은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원에 대한 기록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내용]

호남로상에 위치한 역원들 중 김제역은 신은역(新恩驛)[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북일고와 단국대학교 사이 산기슭에 있는 신부동 역말]과 광정역(廣程驛)[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장터마을] 사이에 있었다. 김제역과 신은역 사이에는 천안삼거리가 있었고, 김제역과 광정역 사이에는 덕평원·원기원·인제원이 있었다.

호남대로 역로는 『춘향전』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그 중 충청도 구간은 “천안삼거리 김제역 마 갈아타고, 덕정, 원터, 광정, 활원, 모로원, 새수막….”이라는 구절에 등장하는데 이 구절에서도 김제역이 나온다. 한편 김제역의 규모와 관련해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성환역지』가 가장 상세하다. 관리와 군인, 일꾼의 종류와 인원 및 소속된 전답의 면적, 일부 건물의 칸 수까지도 기록되어 있다. 관련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안에 속한 것인데 본역[5성환역]에서 60리이다[屬天安自本驛六十里]. 감관(監官) 1인, 수리(首吏) 1인, 행병(行兵) 2인 , 장계군(狀啓軍) 3인, 서자(書者) 6인, 창사(倉舍) 3칸, 마호(馬戶) 15명, 마부(馬夫) 15명, 역장(驛長) 1인, 복호(復戶) 77결 30부, 마위전답기결(馬位田畓起結) 23결(結) 82부(負) 중에서 7결(結)은 해마다 묵은 것이나 실지로는 16결 82부이다. 환상미(還上米) 13석 10두 9홉 5작 갑자년(甲子年-1864)의 환상미를 합하여 기록한 것이다.”

보통 역원이 위치하는 마을은 역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으나 김제역은 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구 수에 비해 역민의 수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은 관련된 일을 처리하던 역사(驛舍)의 규모나 역의 운영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쓰인다. 하지만 현재는 김제역에 관련된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더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변천]

오랫동안 호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던 교통 요지에 위치하여 있던 김제역은 1895년(고종 32) 역원제가 폐지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이 폐지된 후 역원 소속의 토지에 국가가 조치를 취하려 하자 이곳을 경작하던 농민들이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청원하는 문서가 다량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제역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교통·통신 제도의 체계와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다만 ‘역말’, ‘역촌’ 등 현재의 지역 명칭 또는 기록들을 통해 김제역의 규모와 기능 등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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