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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98
한자 金承露
영어공식명칭 Gim Seungro
이칭/별칭 천뢰,송오,충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59년(공민왕 8)연표보기 - 김승로 출생
몰년 시기/일시 1438년(세종 20)연표보기 - 김승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39년(세종 21) - 김승로 우의정에 증직됨
추모 시기/일시 1439년(세종 21) - 김승로 묘갈을 세움
추모 시기/일시 1961년 - 김승로 신도비를 세움
추모 시기/일시 1986년 - 김승로 새로운 묘갈을 세움
거주|이주지 김승로 낙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느리골 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승로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람리 산35-1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강릉
대표 관직 지인주사|우의정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강릉김씨 송오공파의 파조이자 입향조.

[개설]

김승로(金承露)[1359~1438]의 자는 천뢰(天賚), 호는 송오(松塢)이다. 전의면 관정리 강릉김씨 입향조이다.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느리골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조에 여러 번 관직을 내려 조정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가계]

김승로의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이다. 고려 후기 왜구 토벌에 공훈을 세운 충절공(忠節公) 김사혁(金斯革)과 군기시사(軍器寺事)를 지낸 김영리(金英利)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안유(安裕)의 증손녀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활동 사항]

김승로는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이 두 형제와 함께 태학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에게 학문을 배웠다. 두 스승으로부터 고려의 앞날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헌사(獻司)형부(刑部)와 4개 주현(州縣)에서 벼슬을 지내면서 치적(治績)[업적]을 쌓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있을 때 고려의 기운이 쇠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김휴(金休)[1350~?]·최호(崔浩)·원천석(元天錫)[1330~?]·서견(徐甄) 등과 함께 송악강사(松岳講舍)에서 강론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김승로는 고려가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강론을 하던 김휴·최호 등과 함께 관복을 찢어 동문 밖에 걸고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통곡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전의면 관정리 느리골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태종이 김승로의 청절(淸節)[깨끗한 절개]을 가상히 여겨 사헌부대사헌에 제수(除授)하고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김승로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전의현 부로곡에서 장사를 지내었다.

[묘소]

김승로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람리 산35-1번지의 큰말 마을 안쪽 야산의 서쪽 비탈길 아랫부분에 위치한다. 묘 앞에는 1439년에 세워진 구(舊)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과 1986년에 세워진 신(新) 묘갈이 있다. 1961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자리한다.

[상훈과 추모]

1439년(세종 21) 우의정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고 충의(忠義)라는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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