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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13
한자 朴仲林
영어공식명칭 Bak Jungrim
이칭/별칭 한석당,문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23년(세종 24) - 박중림 문과에 급제함
활동 시기/일시 1451년(문종 1) - 박중림 경기도관찰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452년(문종 2) - 박중림 공조참판이 됨
활동 시기/일시 1453년(단종 1)연표보기 - 박중림 형조판서가 됨
몰년 시기/일시 1456년(세조 2)연표보기 - 박중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39년(영조 15) - 박중림 신원 회복됨
추모 시기/일시 1784년(정조 8) - 박중림 좌찬성에 증직됨
추모 시기/일시 1791년(정조 15)연표보기 - 박중림 어정배식록에 등재
거주|이주지 박중림 거주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박동 지도보기
외가|처가 박중림 외가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학당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순천
대표 관직 공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신으로 사육신 박팽년의 아버지.

[개설]

박중림(朴仲林)[?~1456]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호는 한석당(閑碩堂),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많은 관직을 역임하다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아들인 박팽년(朴彭年)을 비롯하여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발각되어 처형 당하였다. 영조 대에 신원이 회복되었다.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을 비롯하여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도 배향(配享)되어 있다.

[가계]

박중림은 박안생의 아들로 안동김씨 총제(摠制) 김익생(金益生)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5남은 박팽년,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박영년(朴永年)이다. 그중 큰아들이 사육신의 대표적인 인물인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다.

[활동 사항]

박중림은 1423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1451년(문종 1) 경기도관찰사 등 외직으로 나갔다가 1452년(단종 즉위년) 내직으로 돌아와 공조참판이 되었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이 널리 알려져 당시 정승인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정분(鄭苯) 등의 추천으로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1455년(세조 1)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크게 통분해 벼슬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히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세조 찬위(簒位)[임금의 자리를 빼앗음]에 크게 통한을 품어 오던 박중림은 아들 박팽년을 비롯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성삼문(成三問)[1418~1456], 하위지(河緯地)[1412~1456]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은밀히 추진하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김질(金礩)[1422~1478]의 밀고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잡혀 그달 8일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 당하였다. 또 다른 아들들인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등도 모두 처형되었다.

[묘소]

1854년(철종 5)에 편찬된 전의 읍지인 『전성지』에 박중림의 묘가 전의현 북7리 박동(朴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찾지 못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739년(영조 15) 박중림이 신원(伸寃)되면서 옛 관작(官爵)[관직과 작위]이 회복되었으며 1784년(정조 8) 예조판서 엄숙(嚴璹)의 상소에 따라 벼슬을 높여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 충신으로 뽑혀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등재되었다.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 정단(正壇)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에도 제향(祭享)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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