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A03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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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현 수안보면 미륵리 노인회장을 맡고 계신 양재옥 씨, 그는 과거와 현재의 미륵리 교육 환경에 대하여 별로 서운한 것 없다고 하였다. 그저 그 시절에는 으레껏 그려러니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미륵리에서 자란 아이들이 6·25전쟁 전에는 산길 30리를 걸어야 하는 수안보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었다. 어린 아이들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학교를 가다말다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어른들도 당장의 생활고에 찌들어 아이들 교육은 거의 신경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6·25전쟁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야학이었다. ‘글 쪼끔 아는 사람이’ 동네 사랑방을 빌려서 ㄱ, ㄴ을 가르쳤지만 그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정부에서 이곳 출신 선생을 보내서 빈집에 가마니 깔고 공부하였고 얼마 후 ‘큰핵교’에서 책상을 줬지만 ‘지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큰핵교’로 다녔지만 ‘가다오다 놀다오고’ 해서 ‘지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분교가 생긴다는 말이 나오고 처음 학교 건물로 ‘홑집’을 짓고 이후 또 고쳐 짓고 해서 서너 번 지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분교에서 양재옥 씨를 비롯한 당시 마을 사람들의 자식들이 초등교육을 다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다시 폐교가 됐고 미륵리 아이들은 다시 ‘큰핵교’로 가서 초등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시의 권유도 있었고 미륵사지, 세계사도 있어 관광 상품을 팔면 될 듯하여 수의계약으로 어떤 사람이 분교 건물에 들어 와서 부처, 석등, 애기 부처 등을 깎아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만, 사가는 이도 별로 없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실패하였다. 또 다음 사람은 다른 곳에서 깎아서 가져다 팔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하였다고 한다. 이후 근처 산에서 나는 물품들을 팔기도 했지만, 결국 건물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학교가 없어져서 서운한 점은 없는가란 질문에 양재옥 씨는 단박에 답한다. “서운한 거는 없어유. 다만 선생들을 위하느라 마을에서 개인 땅에다 선생 사택까지 지어 줬는데 어떻게 잘못해서 그걸 뺏겼어유, 그만… 뺏긴 것만 서운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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