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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 수집 반발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501
한자 米穀收集反撥事件
이칭/별칭 10월 항쟁,추수 봉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기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0월연표보기 - 미곡 수집 반발 사건 발생
성격 봉기

[정의]

1946년 10월 미군정의 쌀 강제 공출 정책에 맞서서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을 포함한 전국의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

[개설]

1946년 경제 정책 실패로 쌀 가격이 폭등하자 미군정은 농민들에게서 쌀을 강제로 수집했고, 조선 공산당 등 좌익은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자 총파업과 공출 거부 투쟁을 시도하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1946년 9월과 10월에 대규모 폭동과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해방 직후 영암군은 좌익 계열의 영암 인민 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통제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초 미군정이 행정권을 접수하였지만, 1946년 2월 인민 위원회 위원장과 보안서장을 구속한 다음에야 실질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좌익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 영암을 비롯한 전국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군정이 강제로 자유 시장 제도를 내세우자 매점·매석이 횡행하면서 1945년 말부터 쌀 가격이 폭등하였다. 이에 미군정이 도시의 식량난을 해결하려고 농촌 지역의 쌀을 강제로 수집하는 ‘미곡 수집령’을 다시 시행하면서 농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 갔다.

[경과]

전국적으로 좌익은 1946년까지도 미군정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신탁 통치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이 격렬해지고 민중의 경제적 불만이 고조되자 1946년 7월 공세적인 새 전술을 채택하였다. 1946년 9월 전국 노동조합 평의회[약칭 전평]의 총파업으로 시작한 좌익 주도의 항쟁은 미군정의 무리한 미곡 수집 정책에 맞선 10월의 추수 봉기[10월 항쟁]로까지 이어졌다.

호남 지방에서는 10월과 11월 사이에 대규모 시위와 경찰서 습격 등이 이어졌는데, 영암 지역에서도 10월 1,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를 열고 경찰서 습격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결과]

미곡 수집 반발 사건 이후 좌우익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1948년 이후 단독 정부 수립이 구체화되자 영암군에서는 미곡 창고 습격, 시종 지서 습격, 우익 인사에 대한 테러, 경찰서 습격 등이 계속 발생했고 좌익의 입산과 유격대 활동, 군경의 토벌이 뒤따랐다.

[의의와 평가]

해방 이후 좌우익 간 폭력적 대결은 1946년 초부터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보다 훨씬 격화된 형태로 진행되었다. 6·25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정치 폭력, 국가 폭력의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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