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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면 남양홍씨 남양군파 집성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93
한자 燕西面南陽洪氏南陽君派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성촌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에 있는 남양 홍씨 남양군파 집성촌.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신대1리에 입향하여 300 여년간 뿌리른 내린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홍주(洪澍)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南陽君派)로, 입향조는 홍순손(洪順孫)이다.

[명칭 유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신대리와 이웃한 성제리에는 남양홍씨 남양군파가 세거하고 있다. 예로부터 연기 지역은 ‘천홍만림(千洪萬林)’이라 하여 남양홍씨부안임씨가 가장 큰 성씨로 꼽혔으며, 신대리남양홍씨가 새롭게 터를 잡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성제리남양홍씨 가에 당호(堂號)를 성제(性齊)라고 일컫던 사람이 살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입향경위]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신대1리남양홍씨는 홍주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로 입향조는 홍순손이다. 홍순손의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홍중복(洪仲復)이며, 어머니는 기계유씨이다.

홍순손은 아버지 홍중복이 감찰로 기계유씨 연기 입향조인 유선(兪善)의 딸과 혼인하였다. 홍중복이 일찍 죽자 기계유씨는 유복자인 홍순손을 낳고 3년상을 치른 뒤 친정인 연기 지역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었다.

[변천]

홍순손의 후손들은 창녕성씨, 강릉김씨, 강화최씨 등 연기 지역의 토착 성씨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남양홍씨 남양군파는 중봉 조헌, 석호 윤문거, 소재 이이명 등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적 관계를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홍신민이 가재(家財)를 기울여서 조헌의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조카인 홍상경은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당시 공(功)을 세웠다. 홍득일은 김일경의 역모 사건에 소두(疏頭)[연명(連名)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로 앞장서는 등 중앙 정치의 변화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게 움직여 왔다.

[인물과 관련유적]

홍신민(洪信民)[1561~1611]은 승문원 정자, 학유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부친의 병환에 피고름을 빨아 내고, 모친상 시묘(侍墓)[부모의 상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삶] 중에 너무 울어 실명 상태에 이르렀다는 효행이 전하여진다. 형제간 우애도 깊어서 조카들에게 논밭을 나누어 주고, 서책도 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는 조헌의 의병에 가재(家財)를 기울여 지원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쌀 300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통정대부승정원 도승지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다.

효교비 5세7효는 홍연경과 아들 홍정설, 손자 홍우적·홍우평·홍우구, 증손 홍만, 현손 홍득일 등 5대에 걸친 7명의 효행을 이르는 말로, 5세7효라 일컬어진다. 영조는 이들의 효행을 기려 1772년(영조 48) 효교동(孝橋洞)이라는 마을 이름을 특별히 하사하였다고 한다. 연서 효교비는 이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며,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홍연경(洪延慶)[1579~1647]은 홍신민의 조카로, 향시에 12번이나 장원을 할 정도로 학문이 출중하였다. 효심도 지극하여 부모가 병이 나자 극진히 간호하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경서를 섭렵하는 데 주력하였다. 충청우도에서는 그만 한 학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전한다. 또한 병자호란 때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책을 갖고 피란할 정도로 학문에 대한 집념이 컸다. 홍연경의 학문과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사후 지역 유림들이 조정에 글을 올려 교관, 도사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다. 후에 공조참의로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홍정설(洪廷卨)[1615~1671]은 홍연경의 차남으로, 부친의 효심을 닮아 조상의 제사를 정성으로 지내었다. 모친이 병이 나자 주야로 옷을 벗지 않고 모셨으며, 노환이 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드리는 등 효도를 행하였다. 3년상을 치르면서는 웃거나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홍정설의 효행을 석호 윤문거가 칭송하였으며, 효행으로 효종 때 도사를 제수받았다. 현종조에서는 호조좌랑에 증직되었고, 영조 때 사복시정으로 추증되었다.

홍정설의 세 아들 홍우적[1634~1701]·홍우평[1640~1699]·홍우구[1646~1698] 3형제는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홍우적은 학문이 뛰어나 대소 향시에서 연속으로 장원을 차지하였지만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또한 어머니가 병이 나자 형제가 함께 밤낮으로 병구완을 하였으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기도 하였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가 3년간 함께 시묘하였다고 전한다. 3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지역 인사들이 청원을 하려 하자 청원 문서를 찢어 자신의 효행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1710년(숙종 36)에 지평에 증직되었고, 이조참의로 추증되었다. 홍우평 역시 효행으로 급복(給復)[조선시대 충신, 효자, 절부 등에게 요역과 전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여 주던 일]을 받았고, 홍우구는 1729년(영조 5)에 효행으로 지평에 증직되었다.

망골 옆에 있는 골짜기는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른다. 시묘동은 효자가 효도하는 골짜기이고, 시묘하는 곳이어서 ‘시묘동’ 또는 ‘시묘골’이라고도 부른다. 효자 홍우적·홍우평·홍우구가 부모상을 당하여 망골 옆 골짜기에서 시묘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형제들을 지키고 우물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시묘가 끝나자 호랑이도 가고 우물 물도 말랐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다.

홍우평의 차남 홍만[1665~1719]은 효행으로 급복을 받았고, 종손 홍득일[1687~1736]은 10세에 어머니 청주한씨[1657~1696]가 돌아가시자 어른처럼 상(喪)을 치렀으며, 12세에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고 손가락의 피를 뽑아 내어 드려 사람들에게 효자로 칭송받았다. 경종 때 스승 이이명이 연루된 신임사화로 말미암아 김일경과 목호룡이 득세하여 도봉서원과 봉암서원에 배향(配享)된 송시열을 축출하려 할 때 반대하였고, 이인좌의 난에는 적이 섬멸되기를 바라며 항상 분향하고 축을 읽었다. 1792년(정조 16) 사림들이 공의 충효를 예조에 알렸고, 1794년(정조 18)에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다.

홍일섭(洪日燮)[1878~1935]은 독립 유공자로 유명한 홍병규(洪秉揆)의 차남이다. 호는 묵재(黙齋), 치석(痴石)이다. 1910년 한일합병의 국치를 당하자 36세 때인 1913년 8월 20일 공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청년 교육에 뜻을 두고 사숙(私塾)[글방]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공주·청주·천안 등지에 독립 선언문과 항일 격문을 배포하고, 3월 30일 조치원 장날을 기하여 대규모 만세 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이후 공주교도소에 투옥되었다. 공주교도소에서 지산 김복한(金福漢)과 조우하였으며, 2년 뒤 출옥하였다. 1935년 5월 14일 오랜 투옥과 고문으로 몸이 쇠하여 사망하였다. 전언에 의하면 신대리의 ‘의넘어’에 사숙이 있었고, 홍일섭 기적비는 기념 사업회 주관으로 주민 성금과 도(都), 군(郡)의 지원을 받아 1978년 세워졌다. 비문은 홍재윤(洪在奫)이 지었다. 1983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표창[제58050]에 추서(追敍)[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등을 줌]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제2675호]에 추서되었다. 현재 남양홍씨 묘역인 영모당 앞에 기적비가 있고, 홍일섭의 묘는 2008년 대전국립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의의와 평가]

1645년에 작성된 『연기향안』 좌목에는 홍연경을 비롯한 입향조 홍순손의 현손들과 홍연경의 아들 홍정설을 위시한 5대에 걸친 후손이 대거 등장하고 있으며, 시대가 흐를수록 향안(鄕案)[향족의 명부]에는 더 많은 수의 남양홍씨가 등재되었다.

성제리의 서당골은 조선 효종 때 공조판서 홍우표(洪禹杓) 부자와 홍우채(洪禹采)가 서당을 짓고 서생을 가르친 곳으로 전하여진다. 조선 후기 효자·열녀 등의 행적으로 표창된 인물 명단인 예조의 『효행등제등록』에서도 연기의 인물 중 남양홍씨가 10명에 이를 정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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