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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면 노송리 경주김씨 상촌공파 집성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95
한자 燕東面老松里慶州金氏桑村公派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성촌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에 있는 경주 김씨 상촌공파 집성촌.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노산경주김씨 상촌공파(桑村公派) 집성촌이다. 노송리는 1구와 2구로 나뉜다.

노송1구의 중심 마을은 노리미와 웅동이며, 노송2구의 중심 마을은 강당이다. 경주김씨 상촌공파는 노리미와 웅동에 살고 있다.

[연원]

경주김씨 상촌공파는 고려 공민왕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자수(金自粹)를 파조로 하며, 노송리 노산에 터를 잡은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노송리로 입향한 인물은 김우(金瑀)의 아들 김언신(金彦信)이다.

[입향경위]

김언신의 아버지 김우는 벼슬을 하지 않고 젊은 선비로 책과 붓을 가까이 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중봉 조헌(趙憲)이 보낸 의병 모집 격문을 접하고 사람이 배운 바를 실천하여 나라를 수호한다는 각오로 향리 사인(士人)[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다.

의병으로 떠난 김우는 금산현에서 5리 떨어진 연곤평(延崑坪)에서 적과 싸우다 숨졌다.

김우의 부인 교하노씨(交河盧氏)는 어린 아들 김언신을 데리고 노송리 뒷산인 아미산의 피란골에서 숨어 지내다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금산으로 갔지만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교하노씨는 조상을 대할 면목이 없어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노송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물]

어머니와 함께 노송리에 입향한 김언신은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그때 이괄의 난[1624년]이 일어나자 김완(金完)의 종사관이 되어 현재 서울 아현동에서 싸워 반란군을 무찔렀다. 그로 인하여 진무원종 일등공신에 올랐다.

12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언신은 다시 아들 김응추(金應秋)·김응춘(金應春) 형제와 함께 남한산성에 인조를 호위하러 출전하였으며, 적군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였다.

김언신의 처 성산배씨(星山裵氏)는 배언량(裵彦良)의 딸이며, 성산배씨 또한 경주김씨와 함께 임진왜란노송리로 피란 와서 정착하게 되어 서로 사돈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으로 김언신과 김응추가 출전하자 김언신의 처 성산배씨와 며느리 김응추 처 밀양박씨(密陽朴氏)는 각각 남편의 갑옷에 색이 다른 천을 꿰매어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놓았다고 한다.

전장에서 남편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성산배씨와 밀양박씨는 갑옷 속의 표시로 시신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남편의 장례를 마친 성산배씨와 밀양박씨는 남편을 따라 죽었다. 사람들은 성산배씨와 밀양박씨를 열녀라 칭송하였다.

경주김씨를 삼충이열(三忠二烈)이라 하는데 삼충(三忠)은 김응신과 아들 김응추·김응춘 3부자이고, 이열(二㤠)은 김언신의 처 성산배씨와 김응추의 처 밀양박씨를 지칭한다.

김언신은 병조참판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고,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고정에 있다. 김언신의 아들 김응추·김응춘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복골에 있다.

[민속유적]

남근석은 아미산 서쪽 노리미 마을 가운데에 있다. 처음에는 현재 세워진 곳에서 15m 동쪽 지점에 있었다. 남근석은 마을 아낙 중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사내아이를 원할 때 남근석에서 정성을 다하여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어떤 이는 남근석을 조금 떼어다가 갈아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떼어 가는 바람에 현재는 윗부분이 많이 망가졌다. 마을 건너 마근[노송2구] 마을에서 남근석이 보이면 마을 아낙들이 미친다고 하여 마근터에서 보이지 않게 나무를 심거나 옮겨 세워 놓았다고 한다.

장승백이는 마을 앞 남쪽 큰길가에 예전에 장승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승은 1960년까지 서 있었지만 장승제가 중단되면서 더 이상 세우지 않았다. 장승제는 정월 보름과 칠월칠석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지냈다.

노리미 산제당은 노리미 뒷산 아미산 서쪽의 중턱에 위치한다. 1970년대까지 산제(山祭)[산신령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 왔다. 산제는 음력 11월 말로 좋은 날을 받아서 지냈다. 제당 아래 우물이 있는데 산제 지낼 때는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제관(祭官)[제사를 맡은 관원]들이 매일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천주교와 노송리]

노송리에 사는 경주김씨와 천주교 인연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하여 아미산에 숨어 살던 강의관 덕분에 맺어졌다. 강의관이 산 아래 노리미에 사는 경주김씨 김동면과 성산배씨 배영호에게 전교(傳敎)[종교를 널리 전함]를 하였다고 한다.

첫 미사는 김동면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김동면은 집을 새로 짓고 상량보에 “天主降生 壹九四參 癸未三月十五日艮坐(천주교생대구사참계미삼월십오일간좌)"라 하여 천주교식 서기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강의관은 두 사람에게 천주교 서적을 빌려주고, 김동면은 공주로 신부를 찾아가 성당 일을 맡아 보고, 배영호는 노송리에서 공소를 열어서 김동만·배영복·배상필 등을 입교(入敎)[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신도가 되는 일]하게 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노산임진왜란경주김씨 상촌공파 김우의 아들 김언신이 입향한 곳으로, 삼충이열이라는 일가의 추열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에는 남근석과 산제당 등 민속 유적과 천주교 유서가 기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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