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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262
한자 浦口
영어공식명칭 Port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강창숙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남부에 동서로 흐르는 금강을 수로로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강이나 하천의 어귀.

[개설]

조선 후기까지 하천은 해양과 내륙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포구는 뱃길과 육로가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였으며 시장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1912년 대전에서 군산에 이르는 호남선과 군산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강경~공주~부강까지 이어지는 금강 뱃길은 지역의 해산물과 농산물의 교역과 수송을 전담하였다. 조선 후기 금강 하류의 강경(江景)은 바닷배[海船]와 강배[江船]가 서로 교차하였던 중계 포구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였다. 또한 충청감영(忠淸監營)이 있었던 공주는 금강 중류의 상업 도시였으며, 장삿배[商船]가 왕래하였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芙江)은 금강 상류의 거점 포구였다. 20세기 초반 금강 뱃길 연안에는 크고 작은 포구가 분포하고 있었으며, 금강 뱃길의 종점은 부강포구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 각 고을에서는 부족한 재원(財源)[재화나 자금이 나올 원천]을 보충하기 위해 조정의 허가 없이 경쟁적으로 포구를 개설하였으며, 금강 뱃길에는 일찍부터 관아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장삿배들이 드나들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1871년(고종 8)에 발간된 『호서읍지(湖西邑誌)』의 「문의현지」에는 “큰 강이 남쪽에 둘렀다.”라고 한 부분에 “배들이 왕래하면서 물고기와 소금이 모인다.”라고 덧붙여 기록하였다. 문의현 가시각나루(利遠津)에도 장삿배가 출입하였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1887년 10월부터 11월까지 금강 유역을 답사하였던 일본인 송전행장(松田行藏)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물이 많을 때는 금강 본류를 따라 부강 상류로 약 31㎞ 올라간 충청북도의 옥천과 영동까지도 50석을 실은 배가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금강 본류에만 장삿배가 왕래한 것은 아니었으며, 미호천을 따라 청주의 오근장[梧根倉]이 있었던 곳까지 강배들이 왕래하다가 1900년대 전기에 토사의 퇴적으로 뱃길이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강 뱃길을 따라 일찍부터 장삿배들이 출입하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부강포구 등 상류 지역에도 포구가 번성하였다. 1910년대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는 세종특별자치시 관내의 나루터 5곳 가운데 부강포구보다 상류인 문의군 삼도면에도 포구 기능을 수행한 나루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금강수로 포구들은 충청 내륙지방의 농산물과 서해안의 소금과 생선들이 모였다가 교환·판매되는 거점으로 번성하였던 곳이다.

[현황]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금강 포구들은 포구 주변의 장시[정기시장]들과 함께 급속히 쇠퇴하였다. 금강 내륙수로 교통의 거점 포구로 명성을 떨치던 부강포구는 1912년 호남선과 군산선의 개통과 함께 대전역이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기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옛 부강포구의 명성은 청주시 문의에서 보은군 회남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염티[소금재]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는 정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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