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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006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윤철원

[정의]

세종 지역의 역사에 대한 개관.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관련 역사기록은 『삼국사기』 지리4 백제편에 ‘두잉지현구지현’이라는 지명으로 처음 등장한다. 따라서 역사 기록을 기준으로 본다면 세종특별자치시의 역사시대는 백제시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사시대 유물이 출토된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세종특별자치시의 역사에 대한 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선사시대]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된 것은 여러 곳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건설하면서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종촌동어진동[옛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종촌리와 송담리]에서 긁개, 찌르개 등이 발굴되었고, 세종리에서는 구성기 유물 33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인근 황용리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었다. 신석기시대 유물은 대평동[옛 대평리]과 반곡동[옛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석삼리]에서 각 1기의 집 자리가 발굴되었다. 또 유물로는 빗살무늬 토기편, 굴지구[구멍 파는 도구]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소정면 대곡리 한절골에서도 간석기 2점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로 보아 세종 지역의 금강 변에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세종 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은 고인돌[지석묘(支石墓)]이다. 주로 금강 연안의 금남면 박산리·대박리·봉기리·장재리·석삼리·신촌리·용포리, 연동면 송용리, 연기면 세종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종촌동 지역에서는 청동검과 동과(銅戈)가 발견되었고, 어진동[옛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진의리]일대에서는 민무늬토기[무문토기(無文土器)] 등이 발굴되었다.

이밖에도 조치원읍, 소정면 대곡리, 연기면 보통리 등지에서 청동기 시대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과 청동유물 및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삼한시대]

삼한시대 세종 지역은 마한 영역에 속하여 있었다. 마한은 54개 부족국가연맹체로 이루어졌다. 세종 지역은 천안의 목지국[일명 월지국]이나 공주 불운국 등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세종 지역은 백제 영역이었다. 세종 지역은 구지현(仇知縣)[전의면·전동면·소정면 일대], 두잉지현(豆仍只縣)[조치원읍·연동면·연서면·연기면 일대], 소비포현(所比浦縣)[금남면 일대] 등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하였다.

특히 현재 세종특별자치시의 중심을 이루는 두잉지현은 백제시대 일모산군(一牟山郡)[청원 문의면]의 영현이었으며, 세종특별자치시의 북부에 위치한 구지현은 대목악군(大木岳郡)[천안 목천면]의 영현이었다.

두잉지현은 백제 패망 후 부흥군이 격렬하게 저항운동을 펼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기 지역을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이던 주류성으로 비정(比定)[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어떤 물체에 대하여 그와 유사한 다른 물체와 비교하여 성질을 정함]하였다.

[통일신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초기[673~689]에 세종 지역에서 불비상(佛碑像)이 조성되었다. 1960년 무렵 불비상이 7점 발견되었다.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이 조성한 걸작으로, 세종 지역[구 연기군]에서만 출토되어 ‘연기불비상(燕岐佛碑像)’이라 불린다.

백제불교미술의 희귀자료로 평가되어 모두 국보[2점]와 보물[5점]로 지정되었다. 757년(경덕왕 16년)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한자화하면서 두잉지현연기현(燕岐縣), 구지현금지현(金池縣), 소비포현적오현(赤烏縣)[일명 적조현(赤鳥縣)]으로 바뀌었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 금지현전의현(全義縣)으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의 행정구역을 10도로 나누었을 때 세종 지역 일부는 중원도, 일부는 하남도에 속하였다가 현종 재위 시 5도양계로 재편되면서 양광도에 속하였다.

1172년(명종 2) 연기현에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가 후에 목천 감무가 겸임하였다. 고려시대에 주목되는 역사기록은 ‘연기대첩(燕岐大捷)’이다. 1290년 12월 원나라 반란세력 합단적(哈丹賊)이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 동계를 거쳐 저항 없이 철령 너머로 침입하였다.

포악무도한 합단적은 원주와 충주성 전투에서 일부 타격을 받고 1291년 4월 하순 연기현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다. 이에 여원 연합군은 5월 1일 밤 목천을 출발하여 이튿날 새벽 연기 정좌산(正左山)에 주둔한 합단군을 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려 김흔(金忻), 한희유(韓希愈) 장군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두고 궤멸시켰다. 이 대첩으로 인하여 곡창지대인 호남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1406년(태종 6) 목천에서 분리하여 연기현에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조선의 행정구역이 8도로 개편되면서 전의현연기현은 충청도에 속하였다. 1414년에 전의와 연기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으로 불렀다가 1416년 다시 연기현전의현으로 나누고 각각 감무를 두었다.

1427년(세종 9) 연기현감 허만석(許晩石)조치원 지역에 제방을 쌓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성공한 치수사업이라는 평을 받았다. 1680년(숙종 6)에 연기 사람 술사 최만열(崔萬說)이 이른바 ‘3복의 변’이라는 역모에 연루되는 바람에 연기현이 일시 폐현되어 문의현에 속하였으나 1685년 복구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연기현전의현에 각각 향교를 두어 지방 인재를 육성하였으며, 사립으로 세운 서원과 서당에서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서원은 봉암서원, 합호서원, 검단서원 등이다. 교통·통신 수단으로 조선 전기 연기현 용수산에 봉수대가 있었으나 이후 폐지되었다. 역참(驛站)으로는 금사역[도담동]과 김제역[소정면 대곡리]이 있었으며, 관영여관으로 조치원(鳥致院)·동진원(東津院)·신원(新院)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연기현의 정만억 승려가 승병을 봉기하여 왜군을 무찌르자 이에 자극 받은 영규대사가 승병을 일으키고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연기 사람 박천붕(朴天鵬)은 조헌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청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연기 현감 임태(任兌)는 왜군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는 박원겸(朴元謙), 박인겸(朴仁謙), 박예겸(朴禮謙), 박의겸(朴義謙) 등 박천붕의 네 아들이 죽산전투에서 모두 순절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연기현전의현을 각각 연기군, 전의군으로 개칭하고 공주부(公州府)에 두었다. 1896년 13도제에 따라 충청남도 관할이 되었다.

[근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조치원역이 개설되면서 1911년 연기리에서 조치원으로 연기군청을 이전하였다. 1914년 연기군전의군, 공주의 양야리면, 명탄면을 합쳐 연기군이 되었다. 일제 초기 조치원은 경부선 철도로 인하여 신흥도시로의 획기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당초 조치원은 충북 청주 관할이었다가 1914년 연기군 북면 조치원리로 편입된 이래 1917년에 지정면, 1931년에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청주와 공주 중간에 위치하여 철도를 이용한 물류기지 역할이 컸다. 1923년 충북선조치원을 시발점으로 개통되면서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의 3·1운동으로는 장날을 이용한 장터 시위, 횃불시위 등을 전개하였다. 읍·면별로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30여 차례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조치원농업보습학교 학생저항운동, 조치원역 인부동맹파업, 백정제사공장 파업 등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교육기관은 읍·면별로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에 조치원공립농업보습학교와 조치원공립실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현대]

광복 후 미군정기인 1947년에 조치원의 일제식 행정구역 명칭인 정(町)을 우리 정서에 맞게 동(洞)으로 바꾸었다. 미군정기에 농업이 지역의 주된 산업이었으나 매년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9일부터 7월 11일까지 미 제24사단 21연대가 전의전투, 7월 16일 제19연대가 대평리 금강방어전투에서 북한군과 대치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전의전투와 금강방어전투는 성공한 지연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연기군청 소재지이던 조치원은 7월 12일 북한군에 점령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전란 수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0년대 재건운동과 식량증산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이렇다 할 발전은 이루지 못하였다. 1969년 12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이때부터 청주에 대한 조치원의 교통 우위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는 통일벼 재배로 농가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새마을 운동이 관내 전역에서 전개되어 생활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하면 된다’라는 정신계발 운동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는 조치원에 고려대학교 캠퍼스와 홍익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섰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 이후 면 단위로 농공단지[노장농공단지, 응암농공단지, 청송농공단지, 부강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희망을 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본격 지방자치가 실현되었다. 1991년 지방의원이 선출되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이 동시에 선출되었다. 1992년 이른바 ‘전 연기군수 한준수 양심선언’은 관권 선거에 일대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는 세종특별자치시[행정중심복합도시] 태동의 시기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시작된 ‘충청권 신행정수도’ 공약은 충청권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2004년 여러 후보지 중에서 연기군 지역이 최종 결정되었다. 그러나 ‘신행정수도특별법’이 위헌으로 결정되면서 파장이 일었다. 이후 충청권의 반발에 부닥치면서 2005년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제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0년대는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의 시대이다.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연기군수를 지낸 유한식 후보가 초대 세종특별자치시장에 당선되어 2년을 재임하였으며, 제2대·제3대 시장에 이춘희 후보가 당선되어 2019년 현재 재임 중에 있다.

정부부처는 2012년 9월 15일 국무총리실 직원 150여 명의 이전을 시작으로 2019년 6월 현재 2실, 11부, 2처, 3청, 2본부, 4위원회, 1심판원 등이 이전을 완료했다. 2019년 말까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이전을 완료하면 18부 중 12부가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사실상 대한민국 행정수도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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